그때 그 사람들 (2005)

9
감독
임상수
출연
한석규, 백윤식, 송재호, 김응수, 정원중
정보
코미디, 미스터리 | 한국 | 102 분 | 2005-02-03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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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기에 자리 없다고 대통령과의 행사에 함께 가지 못하고 병원을 찾은 중앙정보부 김부장은 주치의로부터 건강이 안 좋으니 잠시 쉬라는 권유를 받는다. 집무실에서 부황을 뜨던 중 대통령의 만찬 소식을 전해 들은 김부장, 잠시 생각에 잠기지만 이내 수행 비서 민대령과 함께 궁정동으로 향한다. 만찬은 시작되고, 오늘따라 더 심한 경호실장의 안하무인스런 태도에 비위가 상한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는 슬며시 방을 나와 오른팔 주과장과 민대령을 호출하여 대통령 살해계획을 알린다.

  김부장의 오른팔 주과장. 오늘도 여러가지 골치 아픈 일들을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는 그는 이런 일들이 이제 지긋지긋하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들려온 만찬 소식에 투덜거리지만 뭐 별 수 있으랴. 함께 할 손님들을 섭외하여 만찬장에 도착한다. 잠시 후, 자신과 민대령을 호출하여 "오늘 내가 해치운다"며 지원하란 김부장의 명령에 잠시 머뭇거리던 주과장, 별 뾰족한 수도 없는 듯 명령에 따르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긴다.

  경비실로 들어온 주과장은 부하 네 명에게 작전을 명령하고 무장시킨다.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충직한 부하 영조와 순박한 준형, 비번임에도 불구하고 끌려나온 경비원 원태, 그리고 해병대 출신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지목된 운전수 상욱까지. 영문도 모른채 주과장의 명령에 따라 각자 위치에서 대기중인 부하들. 침을 꼴깍이며 잔뜩 긴장한 채로 김부장의 총소리를 기다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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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하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영화 <그 때 그 사람들>에 등장하는 원조각하 말입니다. 굳이 현 대통령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각하는 강력한 정치적 형상으로 한국 현대 정치사를 여전히 좌우하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일부 사람들이 그 흔적을 지우거나 절하하려 노력하더라도 끊임없이 유령처럼 돌아오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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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오랜만에 <그 때 그 사람들>을 다시 보았습니다.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암살된 하루 동안의 일을 그린 풍자적 블랙코미디이지요. 제목은 10.26 사태 당시 연회장에서 가수 심수봉이 불렀던 히트곡 그때 그 사람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의 귀환을 끊임없이 목격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제목이지요. 이 영화는 그 날의 역사적 사건을 새롭게 창작한 작품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대통령 살해사건에 가담하거나 휘말리면서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된 사람들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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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당시 상황을 풍자적으로 재구성하는데, 특히 잘 알려진 당시의 인물들을 묘사하는 데에 주력합니다. 대통령 역에는 송재호, 대통령을 저격하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떠올리게 하는 김 부장 역은 백윤식, 김 부장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 주 과장 역은 한석규, 심수봉을 떠올리게 하는 가수 송금자 역은 자우림의 김윤아, 그 외 정종준(참모총장), 정원중(경호실장), 김영인(최총리), 심우창(국방부장관)과 감독 임상수가 김 부장 주치의인 육본 헌병을 맡았습니다, 그 외에도 봉태규, 홍록기 등이 육본 초병으로 카메오 출연합니다, 윤여정이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습니다. 모두 당시 인물의 스타일이나 표정, 말투 뿐만 아니라 흔히 알려진 성격 등도 패러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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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시작과 함께 자막을 통해 세부사항과 심리묘사는 모두 픽션입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변호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편향 시비를 피해가려는 의도가 담겨있지요. 그러나 이 영화는 개봉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논픽션 다큐멘터리를 세 장면이나 넣은 것이 문제가 되었지요. 실제 사건을 다루면서도 극적 효과를 위해 사실을 비틀어 사건을 변화시킨 의사(擬似) 역사(pseudo-history)” 영화는 할리우드에도 흔하게 등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일부 다큐멘터리 장면을 삽입하면서 블랙코미디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지요. 결국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이 명예훼손을 이유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고 법원이 영화의 몇 장면으로 인해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 점을 인정하여 실제 다큐멘터리 장면(350)은 무지 화면으로 처리된 채 개봉되었습니다. 또 실명의 배역명이 모두 수정되기도 했습니다.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의해 영화 장면이 삭제된 것은 그때가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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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상수 감독은 우리나라의 사회적 지형도를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에 유능한 감독입니다. <바람난 가족>에서 중산층의 아이는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해부하듯 선뜩하게 그려냈고, 이어 개봉한 <하녀>에서는 중산층이 실종된 나라에서 발언권을 박탈당한 노동자의 유일한 저항 수단을 상징적으로 묘사했지요. <그 때 그 사람들>에서는 대한민국의 한심한 근현대사가 어떻게 아직도 발을 딛고 서있는가를 에둘러 보여줍니다.


  특히 이 영화가 갖는 강점은 공간에 대한 인식에 있습니다. 카메라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공간을 샅샅이 훑습니다. 카메라의 세심한 움직임을 통해 영화는 공간을 정의하고 나아가 시대와 그 시대의 유령이 잔존하는 오늘의 시대까지도 정의하게 됩니다.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 방과 방을 타넘으면서, 남산 중앙정보부는 사랑을 말하기 부적합한 공간으로 변모하고, 궁정동 안가는 하얀 부엌이 붉은 피로 뒤덮이는 살육의 현장이 되는 식입니다. 밥을 먹거나 섹스를 하는, 생활로 직결되는 모든 공간이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편 카메라는 김 부장 일당이 작당을 하는 모습을 마치 담벼락 너머에서, 나무 위에 숨어서, 여러 곳에서 훔쳐보듯 응시하곤 하는데, 이는 그 날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 사실은 그들의 전략이 영화 내내 카메라에 의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임을 밝히는 듯 합니다. 육군본부 장악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 어디로도 갈 수 없어 광화문 앞길을 주 과장의 자동차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데, 광화문 너머로 옛 조선총독부 건물과 청와대가 함께 서 있지요. 이미 1995년에 철거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굳이 복원해가면서 카메라를 광화문 바깥까지 널찍이 찍은 사실이 중요합니다. 영화는 이순신 장군과 옛 조선총독부와 박정희,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이 셋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장면을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폭력과 비상식의 시대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낱낱이 서술하는 것과 같은 성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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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늘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외형적으로만 동일한 현재에 존재할 뿐이다."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현상을 비동시성의 동시성(The 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이라는 형용모순으로 설명했습니다. 사회적 갈등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함께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의 재림을 목격하며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상당수의 그 때 없던 사람들이 느끼고 있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