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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 막바지인 1865년. 모든 인간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믿는 링컨 대통령은 전쟁이 끝나는 순간 노예제 폐지도 물거품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전쟁 종결 이전에 헌법 13조 수정안을 통과시키려 한다. 그러나 수정안 통과를 위해서는 야당의원으로부터 20여 표를 회유해야 하고, 동시에 성급한 표결 시도에 반발하는 공화당 의원들을 다잡아야 한다. 불법과 합법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표결을 준비하는 도중 남부로부터는 평화 제의가 들어오고 종전 이전에 수정안을 통과시킨다는 링컨의 구상은 위기에 부딪히게 되는데…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 게티즈버그 연설 중
“저한테 얼굴이 하나 더 있다면, 제가 이 얼굴을 하고 다니겠습니까?”
- 두 얼굴을 가졌다고 링컨을 비판한 더글러스의 말을 받아치며
“다른 사람들이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념을 위해 싸운다고 말할 때, 링컨은 이념을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한다.” - 칼 마르크스
“(링컨은) 미국 전체보다 더 크고, 미국의 모든 대통령을 합친 것보다 더 크다” - 레프 톨스토이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입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근면함과 성실함만으로 자수성가해 대통령이 되었으며,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미국을 재통합하고, 무엇보다도 헌법 13조 수정안으로 노예제를 폐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 평가를 조사해보면 항상 1위를 차지하곤 합니다. 미국 정치인 중에 기이할 정도로 신성시되고 있는 편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전쟁 영웅이며 국가 재건의 상징이고, 사생활은 도덕적이었고 인도주의적 업적까지 이뤘으니 정치 지도자에 바랄 수 있는 것은 모두 갖춘 셈이니까요.
그런 링컨의 이야기를 스필버그가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재선 성공과 수정헌법 13조 통과 직후까지의 짧은 시기에 집중해서요. 이러한 시점 선택은 미국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한 것은 2012년 11월로,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한 시기와 겹칩니다. 영화의 원작인 도리스 컨스 굿윈의 <Teams of Rivals:the Political Genius of Abraham Lincoln>을 버락 오바마가 진지하게 탐독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지요. 잘 알려진 헐리웃 리버럴 중 한 명인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통해 오바마의 개혁성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동시에 그를 위한 한 준거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영화는 오바마에게 개혁을 위한 전략을 제공하려는 숨은 의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위인 링컨에 대한 일반적인 전기라기 보다는 스필버그에 의한 독특한 한 해석이라는 겁니다.
스필버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간단히 말해 ‘타협’입니다. 타협, 혹은 적과의 동침이라는 테마는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작가주의적 욕망이 분출될 때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지요. 그러나 <쉰들러리스트>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심지어 <뮌헨>에서도 타협은 비극적 인도주의와 관계되는 반면 링컨에서는 보다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 타협이 강조됩니다. 큰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협은 불가피하며, 심지어 바람직하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목표에 대한 타협이면서 동시에 양심에 대한 타협이기도 하지요. 예컨대 공화당 급진파이자 평생동안 흑인의 자유를 위해 싸워 온 새디어스 스티븐스가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 신념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게 되는 장면을 스필버그는 영웅적으로 묘사합니다.
그 결과 영화 <링컨>을 지배하는 것은 마키아벨리적 정치관입니다. 링컨은 헌법 13조 수정안을 원하는 시점 내에 통과시키기 위해 (거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야당 의원들을 관직으로 매수하고, 여당 의원들에게조차 비밀로 한 채 남부와 교섭하며, 적당한 둘러대기와 거짓말도 일삼습니다. 스필버그는 이 모든 ‘명백히 비도덕적이지만 불법이라고 말하기는 논쟁적인’ 과정을 도덕적 모호함 속에 묻어둡니다. 대신 이 과정을 통해 획득한 거대한 업적인 ‘노예제 폐지’를 부각시키지요. 그 결과 관객들은 비도덕성을 인식하기는커녕 링컨의 전략에 일종의 쾌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요령 좋은 영웅이 무수히 깔릴 장애물을 넘어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의 쾌감이지요. 게다가 막바지에 이르면 예기치 못한 행운도 찾아옵니다. “운명(fortuna)은 스스로 무엇인가 위대한 힘을 발휘하여 좋은 기회를 찾아다니는 정신력 강하고 재능(virtu)이 풍부한 인물을 선택한다”(군주론)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그대로 플롯으로 재현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성취하게 될 ‘노예제 폐지’라는 업적에 대한 링컨의 이상주의적 의지는 그의 마키아벨리적 이중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합니다. 링컨은 선을 행하기 위해 불선을 서슴치 않으며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대립관계를 해소해 갑니다. “자기를 주장하고자 하는 군주는 선하지 않은 것을 배우고 또 그 상황의 필요에 따라 그 지혜를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일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군주론) 그러나 링컨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치행위에서만 비르투를 발휘하며, 특히 보편적 인간성이라는 도덕적 선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필버그의) 링컨이 ‘잘못 이해된’ 마키아벨리적 협잡배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정치배들과 구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마키아벨리적으로 재해석된 링컨의 위대함은 또다시 그의 이상주의로 돌아가게 됩니다. 위대한 이상이 없이는 협잡배와 위인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치에 대한 해롤드 라스웰의 유명한 정의인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Who gets what, when, and how)’에 이제 ‘왜(why)’를 덧붙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 행위는 언제나 단순한 배분과정을 뛰어넘는 가치와 정당성의 문제가 있지요. 링컨이 위대한 이유는 굿윈의 말처럼 그의 정치적 천재성(Political Genius)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정치적 천재성을 인류의 보편성이라는 위대한 이상을 위해 사용한 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것으로 족한 것일까요? 헌법 13조 수정안의 통과가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후대의 입장에서는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간에 정치적 결단을 밀어붙이면 정당성은 역사가 판단해 주리라는 신념이 정치를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 직접 목격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대의를 위해 사소한 악을 감수할 수 있다는 정치적 신념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유아적 도덕성의 다른 모습일 뿐임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 대의가 만인의 평등이나 인간 해방과 같은 압도적인 것을 때에도 우리는 도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링컨>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미국의 어떤 역사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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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근히 살아서 김근근인 역사/정치학도.
작품을 감상할 때면 주제보다도 시대와 맥락에 과도한 흥미를 느끼는 변태.
치킨과 두부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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