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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김연수의『세계의 끝 여자친구』(문학동네, 2009)를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코끼리'에 대하여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 - 레이먼드 카버에게」
위에 링크한 노래는 아일랜드 출신 가수, 일명 쌀아저씨라고 불리는 Damien Rice의 <Elephant>입니다. 노래의 내용을 간추린다면 이러합니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지만, 너를 도무지 잊을 수가 없네. 이제 제목에 집중해봅시다. 노래의 제목은 ‘코끼리’입니다. 제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영어 관용어 표현 하나를 알아야합니다. ‘elephant in the room’이라는 것인데, 이는 모든 사람이 인식하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노래 속에서는 ‘you’가 바로 ‘elephant’입니다. 나(I)와 내가 지금 사귀고 있는 그녀(she)가 모두 인식하고 있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고 있는, 나의 떠나간 애인(you)의 존재 말입니다.
노래는 떠나간 ‘너’를 잊지 못하는 ‘나’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는 그런 그를 사랑하고 있는 ‘그녀’가 눈에 밟힙니다. 이전 사랑을 잊지 못하는 그를 바라보는 심정은 어떠할까요? 그렇다는 사실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그가 얼마나 야속하고,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자신은 얼마나 비참할까요? 아무래도 이 노래 속 '나'는 가련한 사람이기 보다는 너무도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갑작스런 노래 이야기에 당황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소설에 관한 이야기에 앞서 이 노래를 소개한 것은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 - 레이먼드 카버에게」가 이 노래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게는 코끼리의 존재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작가의 말에서 인용한 부분입니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는 데미언 라이스(Damien Rice)의 <Elephant>를 듣고 긁적인 문장들에서 시작된 소설인데, 다 쓰고 몇 달이 지난 뒤에야 그즈음 한창 번역하던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317, 작가의 말)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과 저처럼 읽고나서 금새 까먹는 분들을 위해 간략한 줄거리 소개부터 해야겠습니다. ‘나’의 집에는 피아노가 한 대 있습니다. 그 피아노는 어느 노인에게 받은 것인데,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되었기에 조율이 필요했습니다. 조율을 위해 ‘사트비르 싱’이라는 이름의 인도인이 옵니다. 그는 아내가 강사로 나가는 한국어 강좌를 수강하는, 아내의 친구입니다. 이 소설은 아내가 송년회에 간 사이에 싱과 ‘나’의 만남을 다룹니다.
소설은 꽤나 불친절합니다. 헤어지기위하여 이별여행을 떠난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부부가 되었는지, 소리가 제대로 나지도 않는 피아노를 주인공은 왜 받아온 건지, 그런 피아노를 아내는 왜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건지, 소설은 독자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남겨 놓습니다. 그것이 바로 코끼리입니다.
‘나’와 아내 사이의 코끼리는 바로 아기입니다. 이별여행에서 두 사람은 끊임없이 사랑을 나눕니다. (이른 아침에도, 햇살이 힘없이 늘어지는 오후에도, 눈 그친 깊은 밤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124)) 두 사람은 이때 아이를 가졌을 테고, 아이로 인해 두 사람은 이별 대신 결혼을 선택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두 사람의 아이는 엄마의 뱃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겁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했을 것이고 다시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연이은 실패 속에 두 사람의 슬픔은 각자의 깊은 고독과 외로움이 되었겠죠. 결국 과거에 두 사람이 상실한 아이와 앞으로 가질 것이라 생각했던 아이는 모두 두 사람의 코끼리가 됩니다. 아내와 ‘나’, 두 사람 모두가 알고 있지만 꺼낼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죠. 서로는 각자의 상처 속에 깊이 빠져들고, 서로는 서로에게 소홀해졌을 겁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피아노는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나’에게 피아노는 일본여행에서 나누었던 대화의 상징이자 관계 회복의 제스처이지만, 아내에게는 문제의 본질에 전혀 관련이 없는 쓸모없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 피아노는 의사소통이 단절된 두 사람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싱이 이야기했던 “노래 안하면 안 삽니다”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관계가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싱은 피아노를 조율하는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아내와 ‘나’의 관계를 조율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 것입니다. 싱은 ‘나’와 대화를 나누며 ‘나’의 아내가 아이를 갖고 싶다고 이야기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제야 오랫동안 숨겨왔기에 잊고있었던 ‘아기’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아내가 가지고 있었을 상처에 대하여도 생각할 것입니다.
노래 제목으로 시작했던 글이 드디어 소설의 제목으로 향하게 됩니다. 송년회를 마치고 온 아내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고, 이제 '나'는 아내의 상처를 보다듬을 것입니다. 소리를 잃은 피아노가 몇 번의 조율을 거치면서 제대로 된 소리를 찾듯이, 두 사람도 다시금 "말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얘기했고, 더이상 말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서로 사랑했"던 관계로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모두에게 복된 새해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by 오까마
높디높은 열정과 낮디낮은 능력 사이에서 방황 중
문학에 관심이 많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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