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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윤대녕의『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문학동네, 2010, 개정판)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상대는 늘 타인이기 마련이다
윤대녕의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그리도 야속할 때가 있다.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를 한 치도 이해하지 못할 때. 이렇게 가까운 사람 역시 타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서러움마저 느낄 때가 있다. 자신을 나아준 부모라 할지라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애인이라 할지라도 한 번은 이렇게 느끼기 마련이다. 결국은, 결국은 타인일 뿐이라고.
모두는 그렇게 타인일 뿐이고,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 속에는 ‘고독’이라는 두 글자가 아로새겨진다.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근원적 고독이 생기지만, 근원적 고독 앞에 서본 사람만이 다시금 이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누군가로부터 이해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작가들은 이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든다. 그 중 하나가 오늘 이야기할 윤대녕의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이하 「많은 별」)이다.
이해를 중심으로 놓는 이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해란 가능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 방법 중 하나는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될 것이다. ‘그’가 속초에서 관계를 가진 함바의 여자는 속초에 남은 수녀 중 한 사람인가, 나운과 그녀의 동생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또는 ‘그’의 아버지는 왜 자식을 외양간에 버리고 나가버렸는가, 또는 해연은 나운을 불러내 무엇을 한 것인가. 그러나 수많은 물음들 앞에서 소설은 그저 함구하고 있을 뿐이다.
왜 작가는 예상되는 질문들에 답을 달지 않은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찌보면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하고, 책 속에 나와있는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오늘 그가 삼 년 전에 헤어진 여자와 마주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상대는 늘 타인이기 마련이어서 그런 일은 부러 얘기를 해주지 않는 한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238) 우리는 타인에게 쉽게 질문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쉽게 얻을 수 없다. 만약 소설이 타인에 대한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그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정말 '소설'일 뿐이다.
「많은 별」은 끊임없이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하지는 않는다. 얼핏보면 소설은 양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해가 불가능하지만, 소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보여주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둘은 양립불가능한 성질이 아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언제나 실패하지만, 그 노력까지 실패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 '그'는 5살배기인 자신을 외양간에 버리고 간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한다. 80년대 초에 누군가 그의 아버지를 논산-강경 간 국도변 술집에서 보았다는 제보를 듣고, 10년이 지나도록 매년 유성우가 내리는 날에는 그 거리를 찾는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날 때에 하모니카와 『세설신어』를 들고 있었기에, ‘그’는 하모니카를 배웠으며, 『세설신어』를 끝없이 반복해서 읽는다.
나는 이제 책을 덮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그’의 시도는 무의미한 것일까. 그런 ‘그’를 이해하려는 나운의 노력은 쓸모없는 것일까. 결국은 실패할 목표를 향한 노력들은 결국 무위로 돌아가는 것인가.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들 사이에서 갑자기 나는 1998년과 1999년 사이에 속초로 향하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게 되었나요? 그럴지도, 라고 그는 내게 간단하게 대답할는지도 모르겠다.
상대는 늘 타인이기 마련이다.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내가 책에서 얻은 대답은 여기까지이다. 삶에 가까이 닮아있기 때문인가? 소설은 언제나 명쾌한 대답보다는 더 깊은 질문을 던져줄 뿐이다.
by 오까마
높디높은 열정과 낮디낮은 능력 사이에서 방황 중
문학에 관심이 많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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